어느 실패한 등반대의 기록
MOUNTAIN MAGAZINE, March, 2009, Vol. 89, pp.258~59.
글·사진 이영준 기자·원정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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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항상 그래왔듯 모든 일의 처음은 인수봉 발치 야영장의 희미한 랜턴불빛 아래서나 우이동 대폿집의 쪽탁자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로왈링 히말라야의 맹주 가우리상카 서벽에 관한 이야기가 우이동패들의 입에서 술안주로 오르기 시작한 건 2년 전 무렵. 흔하지 않은 새로운 대상지에 솔깃한 나는 순전한 호기심으로 그 산에 대한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또 바쁜 일상 속에 흰산에 관한 생각은 곧 잊게 되었다. 그런데 출국날짜를 석 달 여 남겨둔 지난 9월, 강성우 대장은 내게 취재기자가 아닌 등반대원으로 함께할 것을 제의했다. 그는 지난 2002년과 2003년 내가 참가했던 네팔 촐라체(6440m) 북벽 등반을 이끌었었고, 89년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 이후 여러 차례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산과 등반에 대한 긍정적 마인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제안에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치워두었던 가우리상카에 관한 자료를 다시 들춰보기 시작했고, 경험해보지 못한 히말라야의 겨울에 대한 기대와 함께 마음은 점점 날카로운 그 산의 정점으로 몰입해 갔다.
최종 함께하기로 결정된 대원은 신동우 피터젠슨 황인선 안치영 등. 우리 여섯은 모두 인수봉, 설악산, 우이동과 알프스, 히말라야 등지에서 서로 복잡한 여러 가닥의 매듭으로 연결된 적이 있는 사이였다. 즉슨, 따로 호흡을 맞춰보지 않아도 될 만큼 죽이 맞았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언제나처럼 우리들의 빈손이었다. 연말 급등하는 환율과 경기불황 속에서 원정대 운용에 필요한 비용과 장비를 모으는 일은 때로 가슴에 소주방울이 맺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산악회와 우이동 선배들의 크고 작은 격려 속에 조금씩 진전을 볼 수 있었다. 크로니산악회 박영배 형의 소개로 로우알파인의 의류와 장비를 지원받은 것을 비롯, 침낭, 텐트, 로프, 가스버너, 파워젤, 알파미, 볶은 고추장과 멸치젓 1통에 이르기까지 우리 여섯의 발걸음 뒤에는 ‘우이동’으로 형용되는 산 사람 모두의 땀이 배어있었다고 할 만큼 성원이 답지한 것이다. 그리고 우이동 여관방에서의 마지막 밤, 한바탕 목포홍탁집 누이의 환송 방문을 받은 뒤 12월 4일 이른 아침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올랐다.
22년간 인간의 발길 없었던 가우리상카 서벽 네팔 히말라야의 로왈링 지역은 아직까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한국 산악인과 트레커들이 많이 찾는 쿰부 히말과 랑탕 히말의 사이에 위치해 있지만, 두 큰 산군의 그늘에 가려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로왈링 지역이 서방세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51년의 일로, 에베레스트 정찰대의 에릭 십튼과 에드먼드 힐러리 일행이 트램바우 빙하를 올라 해발 5705m의 데시랍차 고개를 넘어 쿰부 히말의 남체 바자르로 진입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이 지역 산 중 가우리상카(7134m)와 티베트령 멘룽체(7181m)를 제외하면 7000m급 이상 되는 산이 없고, 2001년까지는 등반 개방된 봉우리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이후로도 일부 산악인과 트레커들만 다녀갔을 뿐 네팔의 다른 산군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는 못했다.
예로부터 지역 원주민들에게 신성시되어온 가우리상카는 주봉인 북봉과 500여m 칼날능선으로 이루어진 남봉(7010m)으로 솟아있다. 가우리상카라는 이름은 힌두교에서 이야기하는 파괴와 재생의 신 ‘시바’의 다른 이름인 ‘가우리’와 그의 아내인 ‘상카’가 합쳐진 말로, 주봉은 상카, 남봉은 가우리 또는 체링마라는 이름으로 각각 불리기도 한다.
맑은 날이면 카트만두에서도 시야에 들어오는 가우리상카는 히말라야 등반 초기부터 많은 산악인들의 관심을 끌어오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등반되지 못했다. 1980년대에 제작한 지도를 보더라도 지금의 지도와 국경선이 다를 만큼 네팔과 중국 사이에 그 영역이 명확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접한 티베트인들과의 잦은 마찰로 등반대의 접근이 어려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힐러리의 탐사 이후 1952년부터 각국 등반대의 7차례 시도 끝에 1979년 봄 윌리엄 알버트와 퍼템바 셰르파가 이끈 미국-네팔 합동 원정대의 존 로스켈리와 도르지 셰르파가 2950m의 고정로프와 고소캠프 4개를 설치해 남서벽으로 초등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2008년 가을까지 총 26개 팀이 등반을 시도했지만 주봉은 3번만 등정되었으며, 특히 서벽쪽으로의 접근은 86년 이후 지난 22년간 한 번도 없어 태고의 대상지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애초 카트만두 체류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려고 했으나 선발대 없이 진행하는 탓에 12월 9일에야 관광성 브리핑을 마칠 수 있었다. 카트만두에서 식량과 장비 등을 준비하며, 사다 람바부 셰르파와 쿡 프렘 라이, 키친포터 3명을 고용했으나 아무도 로왈링 지역에 가본 경험이 없어 현지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수배해야만 했다. 우리가 소개받은, 일본 쿡으로 일하고 있는 체링 타망은 가우리상카로 가는 길목인 라마바가르 출신으로 지난 86년 스페인 팀 포터로 베이스캠프에 가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그는 지도를 보며 겨울철에는 카트만두에서 싱가티까지 9시간여 버스로 이동하게 되며, 이후로는 5~6일 도보카라반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어프로치 루트 설명을 들은 후 그를 본대 출발보다 3일 먼저 카라반이 시작되는 싱가티로 보내 포터를 수배해놓도록 했다.
10일 화물 통관과 무전기 사용허가를 받은 후 출국 일주일만인 11일에야 상행 카라반을 시작한 우리들은 식량과 장비 1.2톤을 버스에 싣고 카트만두를 떠나 차리코트와 돌라카를 거쳐 싱가티로 향했다. 차리코트는 쿰부 히말이 시작되는 지리와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는 도시로, 1980년대까지 원정대는 이곳에서부터 카라반을 시작했다. 지금은 돌라카까지 도로가 포장되어있고, 이후로도 싱가티까지 약 20여km 거리는, 비포장이지만 길이 놓여있어 카트만두에서 하루 2회 시외버스가 오가기도 한다.
버스가 돌라카를 지나며 눈앞에 가우리상카의 모습이 들어오자 다들 기분이 조금 들뜬 것 같았다. 싱가티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30분, 우리가 그 엄숙하고도 장엄한 세계로의 첫 발을 디뎠을 땐 이미 날이 저문 후였다.
카라반 4일째 산사태로 길 끊겨 고투 다음날 아침, 모여든 포터 중 46명을 고용하고 짐을 분배해 본격적인 카라반을 시작했다. 싱가티의 해발고도는 약 950m이며, 이후 거치게 되는 마을인 자갓과 마지막 마을인 라마바가르도 채 2000m가 되지 않아 한낮에는 매우 뜨거운 뙤약볕 속에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수리도반(1024m)부터는 보테코시 협곡 왼쪽으로 절벽에 도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3년 후 개통을 앞두고 있다는 그 길은 라마바가르에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진입로라고 했는데, 줄곧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려 온 계곡을 굉음 속에 몰아넣고 있었다. 도로가 완공되면, 이 한적한 산자락은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13일 라마바가르에 도착한 원정대는 체크포스트인 경찰서에 들러 일정을 설명했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경찰은 셰르파를 통해 “올해 이곳까지 온 외국팀은 당신들이 두 번째이며, 난 근무 기간 동안 한 번도 원정대를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라마바가르는 국경과 인접한 마지막 타망족 마을로, 학교가 있을 정도로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나이케(포터 우두머리) 체링 타망은 “내일부터는 마을이 없고 길도 험해지기 때문에 포터들은 ‘짬바’(고또라는 곡식을 빻아 반죽해 먹는 일종의 행동식)를 먹으며 이동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다음 날부터 만만치 않은 길이 시작됐다. 한발이라도 헛디디면 바로 급류 속으로 처박힐만한 절벽 곳곳에 대나무로 엮은 엉성한 나무 사다리가 놓여있었으며, 포터들은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며 아슬아슬하게 그 구간들을 통과했다. 지도에 훔(Hum)이라고 표시되어있는 지점이 첫 캠핑사이트였는데, 길 한가운데에 작은 마니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곳이었다. 7시간여 운행 끝에 도착한 그곳에서 사면의 잡목들을 제거한 후 텐트 한 동을 칠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고, 포터와 다른 스태프들은 각자 비박을 했다.
다음 날도 비슷한 길이 이어졌다. 존 로스켈리는 1979년의 등반기록에서 “대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정글을 따라 붉은 색 페인트로 표시를 하며 이동했다”고 적고 있는데, 가끔 돌 위에 칠해진 붉은 화살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티베트 국경과 나란히 이어진, 라마바가르에서부터 3번째 골짜기가 그전 등반대들이 접근했던 ‘추말 추’라는 계곡이었다. 아직 고도는 2500m대에 머물렀지만, 이제 이틀만 더 이동하면 3일째는 베이스캠프에 입성하게 될 것이었다.
운행을 시작 한지 4시간쯤 지난 무렵, 설악산 저항골과 같은 큰 계곡 건너편에 앞서 갔던 포터들이 모여 웅성이고 있었다. 산사태로 길이 끊겨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성우 대장은 황인선·안치영에게 로프 1동을 들고 산사태 지점 위쪽으로 길을 찾아보도록 지시하고, 체링 타망과 람바부 셰르파도 각자 길을 찾기 위해 정찰에 나섰다. 하지만 3시간여 산사태 지점 위쪽을 살펴보고 돌아온 그들이 가지고 온 대답은 “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우리는 일단 이곳에서 하루를 묵기로 하고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텐트에서는 회의가 열렸다.
“하루에 500달러씩 비용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이 며칠만 계속되면 이대로 원정을 끝내야 할 수도 있다.” “일정보다 늦어지더라도 포터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조금씩 개척해 전진해보자.”
모두들 여러 고민 끝에 후자에 의견을 모았다. 1964년 처음 이 계곡으로 접근했던, 돈 윌란스가 이끈 영국 원정대는 포터들의 이동이 불가능해지자 불과 265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ABC를 4725m에 설치하는 강행군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79년 미국팀은 카라반 루트에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106명의 포터들을 일일이 빌레이 하며 끝내 체링마 빙하 위의 베이스캠프에 입성했던 것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와 안치영, 람바부 셰르파, 키친보이 쿠말 라이는 쿠크리 칼 한자루를 들고 정글을 헤치며 길을 만들어 나갔다. 통나무를 잘라 사다리를 만들고 옷깃을 부여잡는 잡목들을 헤치며 사람이 다닐만한 등로를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들고 더디게 진행됐다. 오전 11시경까지 4시간동안 산사태 지역을 이리저리 우회해 케른으로 표시해가며 우리가 진행한 거리는 불과 500여m에 지나지 않았다.
“포터들이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제 괜찮다고 잘 달래서 움직여 봐라.”
후미에 포터들과 함께 출발한 황인선과 강 대장의 무전을 듣고 나서 조금 불안한 감이 들기는 했지만 우리들은 줄곧 계곡 사이로 길을 찾아 표시하며 전진해 나갔다.
오후 3시, 포터들은 “이제 먹을 것이 없다”며 짐을 내려놓았다. 원정대가 비용을 지불할 테니 사람을 내려 보내 식량을 사서 올라가자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갈 마음이 없어보였다. 얼마간의 실랑이 끝에 더 이상 이동이 불가능한 쪽으로 분위기가 확고해졌고, 우리는 일단 라마바가르까지 돌아가서 시미가온을 거치는 가우리상카의 남쪽 사면으로 접근을 시도하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록상 서벽쪽으로 접근했던 모든 원정대는 라마바가르에서 포터 파업을 겪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다음 날 아침 포터들은 “약속한 기간이 지났다”며 짐을 옮기기를 거부했다. 결국 1/2 스테이지 거리인 시미가온까지 하루 일당을 쳐주기로 하고 달랜 끝에 그들은 걸음을 옮겼으며, 시미가온에 도착해 우리는 모든 포터들과 가이드였던 체링 타망을 해고할 수 밖에 없었다.
12월 19일, 황인선은 결국 모두의 만류에도 더플백을 꾸려 메고 포터 1명과 함께 산을 뒤로했다. 그는 산사태지점을 돌아 내려올 때부터 “이제 등반하고 싶은 마음이 없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었다. 나는 그와 이미 두 차례 함께 히말라야에서 줄을 묶은 경험이 있어 진심으로 그와 함께 등반을 계속 하기를 원했지만, 곧 명징한 논리를 내세워 그의 마음을 다시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내게 “내가 등반을 포기했다고 기록할 건가?”라고 물었고 나는 “사실을 적는 것이 기록”이라고 대답했다.
호주의 환경단체 에코트렉에서 지원해 만든 시미가온의 로지는 깔끔하기도 했지만 가우리상카가 한눈에 올려다 보여 지친 모두의 마음을 조금은 밝게 했다. 마침 이틀간 그곳에서 쉬는 동안 베이스캠프를 안다는 동네사람과 사냥꾼을 만날 수 있었고, 스태프들은 모든 마을사람들을 만나 설득한 끝에 접교 1마리와 포터 12명을 구할 수 있었다.
카라반 13일만에 남쪽으로 접근, 베이스캠프 도착
12월 20일, 대오를 정비하고 카라반이 재개됐다. 첫날은 지도에 단지 ‘카르카’(집)라고만 표기된, 로왈링 계곡가의 ‘동강’이라는 작은 마을을 거쳐 이튿날부터는 다시 그 지류인 통마르낭 계곡을 거슬러 길이 없는 정글을 뚫고 전진해 나가야했다. 포터들이 아침을 먹는 사이 선발대 몇 명이 쿠크리를 들고 나무를 잘라가며 길을 뚫으면 본대가 뒤이어 출발하는 식이었다.
“50년대 원정대 같군.”
하루에 높인 고도가 200m에 불과한 날도 있었고, 흙사면을 깎아내고 텐트를 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포터들이 별 불만 없이 잘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4일째인 12월 23일, 카라반을 시작한 지 4시간쯤 지난 점심 무렵, 우리는 삼면이 절벽으로 가로막힌 3800m 지점의 빙하모레인 지대에 닿았다. 지도의 등고선은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완만했으나, 그와 전혀 달리 등반을 하지 않고서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절벽이었다.
우리는 다시 난관에 맞닥뜨렸다. 포터들은 모두 짐을 내려놓았다. 베이스캠프를 안다고 했던 그들은 “이곳은 티베트 땅이며 베이스캠프가 맞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리 지도를 봐도 저 벽을 넘어선 곳이 그전 원정대들이 사용했던 베이스캠프였다. 하지만 이제 다시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갈 여력과 비용도 남지 않은 우리들은 결국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13일간의 긴 카라반이 끝난 것이다.
며칠간 캠프를 설치하고 정찰을 시도했지만 하루 종일 주변을 뒤덮는 가스로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그동안 마을에 남기고 왔던 짐을 포터들이 가지고 올라와 27일에야 모든 식량과 장비가 베이스캠프에 모이게 됐다.
28일 라마제를 지낸 후 다음날 새벽 모두 함께 본격적인 정찰에 나섰다. 그동안 관찰결과 오전 10시경부터 계곡에 가스가 몰려오기 때문에 보다 이른 시간에 최대한 높이 올라가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피터와 한조가 된 나는 정면 벽의 왼쪽으로 난 모레인 쿨르와르를 따라 7시간여를 허우적거리며 올랐다. 예외 없이 가스가 몰려왔지만 다행히 고도가 4500m를 넘어서자 구름은 발 아래 있었고, 그것이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라 며칠간 전국적으로 날씨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는 콜을 지나 4890m 고도를 가리킨 작은 봉우리까지 올라섰는데, 그곳에서야 가우리상카 서벽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찰 결과 500m쯤 되는 하단벽을 올라 눈 쌓인 쿨르와르를 넘어 횡단해야 서벽과 연결되는 선을 그을 수 있다는 판단을 했고, 모두에게 이를 설명해주었다.
30일, 강 대장과 신동우 대원, 나는 안치영의 선등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4200m 지점까지 걸어 올라가 정면 벽의 가장 왼쪽으로 루트 파인딩을 한 우리들은 첫날 5피치 300여m 고정로프를 설치했다. 간간히 잡풀들이 우거진 그곳은 작은 오버행도 있었지만 낙석위험을 제외하면 5.7~8급 정도로 크게 어려운 곳은 아니었다. 다음날 피터가 가세해 하단벽 10피치 총 500여m 고정로프를 설치하고 하산했으며, 지그재그로 나 있는 로프와 불안한 피톤을 보수해 주마링이 편하도록 정비하는 작업도 함께 했다.
새해 첫날,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밤 줄곧 눈이 내렸다. 하루를 쉰 다음 날 우리는 하단벽과 긴 모레인 지대를 넘어 표지기를 꽂아가며 4800m 지점의 빙하 상단 플라토에 도착했다. 비교적 경사가 없는 얼음을 고르고 3인용 텐트 1동을 설치하는 데 3시간여가 소요됐다. 베이스캠프에서 1000m나 고도차이가 났기 때문에 모두 힘겨워했다. 하지만 몇 번 운행해 적응이 되면 오가는 시간이 단축될 것이라 생각하고 데포 캠프(D1)라고 이름 붙였다. 1월 5일, 피터와 안치영, 나는 눈 얼음 등반에 필요한 장비와 침낭들을 챙겨 D1으로 향했다. 이제 며칠간 그곳에 머무르며 캠프 위쪽 서벽과 만나는 쿨르와르를 넘어설 생각이었다.
첫날, 완만한 설벽 200여m를 각자 올라 병목과 같은 좁은 걸리를 안치영의 선등으로 통과했다. 바위가 부스러져 확보물 설치가 쉽지 않았기에 첫 30m를 통과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이후 깊은 눈을 넘어 왼쪽 바위지대로 두 번째 피치를 완료한 후 내가 선등을 이어받았다. 설벽 70여m와 완경사의 바위턱 10여m가 이어졌고 이후 피터가 앞서나가 6피치 300m의 고정로프를 설치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사탕 몇 개만 먹고 등반한 우리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저물녘이 되어서야 캠프로 돌아내려왔다.
등반에 앞서 준비했던 장비는 7mm 로프 1000m와 네팔에 남아있던 11mm 로프 300m였는데, 카라반 중 100m는 잘라서 사용했기 때문에 하단벽을 통과하는데 500m가 소요되는 등 실상 본 등반에서 사용할 로프가 여의치 않았다.
“처음부터 알파인 스타일로 가야 하는 것 아냐?”
“힘들겠지.”
다음 날 우리는 9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천근만근한 몸을 일으켜 짐을 쑤셔 넣고 운행을 시작했지만 곧 모두 넉다운되어 눈밭에 쓰러졌다. 결국 하루 휴식을 하기로 하고 다시 캠프로 돌아와 텐트 속에 몸을 뉘어야했다.
20피치, 1600m 올라 5400m 도달로 등반 마쳐
8일, 다시 등반이 이어졌다. 쿨르와르에는 12시가 넘어야 햇볕이 들어왔기 때문에 오전 내내 매우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6피치에서 안치영이 앞줄을 묶었다. 설벽을 왼쪽으로 횡단해 만나는 바위지대는 그저 크고 작은 돌들이 얹혀있는 것에 불과할 정도로 불안해보였다. 한 피치를 올라선 그에게 다가갔을 때 숨을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 선등을 바꿔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전날 피터가 내게 “치영은 등반 잘 하니까 우리는 문제 없어”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그런 태도가 우리 셋에게 옳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나 또한 스스로 몸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많이 지쳐있었다.
치영은 묵묵히 빌레이를 넘기고 앞서 나갔다. 줄곧 낙석이 떨어졌지만, 그 또한 몇 번 지나자 무감해져 두려움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좁은 걸리를 넘어 공제선 밖으로 사라졌다.
휑한 바람소리만 세차게 들려오던 그곳은 5400m 고도를 가리킨 넓디넓은 눈 평원이었다. 가우리상카 서벽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으며 오른쪽으로 공룡의 거친 등뼈 같은 서릉이 위압적으로 솟아있었다. 서벽은 바로 코앞에 있는 듯 했으나, 그곳까지 접근이 최소한 하루 이상은 걸릴 것이라는 걸,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진 장비와 남은 체력으로 정상까지 갈 가능성보다 실패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걸 모두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듯 했다. 치영과 피터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진이나 같이 찍자.”
치영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그 자리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던 우리는 그날 베이스캠프로 하산했다.
나는 남은 450m의 로프와 장비로 최대한 등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서릉으로 루트를 변경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79년 피터 보드맨 일행이 서릉을 통해 남봉을 초등했을 때에도 로프 400m를 준비했을 뿐이며, 알파인 스타일로 남봉에 도달한 후 올라간 길로 내려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마지막 3일간 굶어야했다.
“1차 목표는 남봉까지로 하자. 이틀 쉰 후 다시 출발하자.”
회의 끝에 강성우 대장은 첫 번째 목표를 세웠다. 텐트로 돌아와 나는 ‘과연 남은 1600m 고도, 등반거리로 치면 3km에 가까운 구간을 알파인 스타일로 돌파할 수 있을까? 올라가면 어떻게 내려와야 할까?’ 하는 고민에 싸였다. 다른 텐트에 있던 피터와 치영도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피터와 안치영은 도저히 더 이상 등반 할 수 없다는 속이야기를 털어놨다. 산을 앞에 두고 물러선다는 것이 클라이머로서 얼마나 굴욕적인 일이며 또한 얼마나 어려운 고민 끝에 그들이 결정 내렸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다시 올 수 없는 이곳에 대한 아쉬움을 나는 쉽게 털어낼 수 없었다.
“힘들더라도 가는 데까지 가보자. 정 안되면 돌아오면 되지, 설마 죽기야 하겠냐?”
“죽는다.”
“……”
결국 남은 며칠간 우리가 한 일은 다시 5400m 지점 콜을 넘어 티베트 땅인 서벽 하단 4800m 지점에서 하루를 보낸 것이었으며, 피터와 안치영은 체링마 빙하 하단까지 내려가 건너편 사면의 마을인지 사원인지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건물을 보고 온 것이었다. 설치한 고정로프 850m는 도저히 당겨지지 않았던 50m를 제외하고 모두 회수했으며, 배낭의 무게에 아쉬움이 더해졌는지 모레인 지대를 터벅터벅 내려오는 동안 장딴지는 더욱 후들거렸다.
1월 19일 새벽, 나는 텐트 밖에서 침낭 커버를 덮고 베이스캠프에서의 마지막 여명을 보았다. 우리가 빈손으로 떠났던 가우리상카. 이제 그 종잡을 수 없던 짧은 여행이 끝나면 저기 지평선 너머에 솟은 또 다른 산을 다시 빈손으로 올라야만 하는 일상이 우리의 앞에 있을 것이다. 산정에 흰 눈이 녹고, 겨울이 가면 또 다른 계절이 찾아오는 것처럼. 추위에 깨어난 포터들의 웅성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국산악회 가우리상카 동계 서벽 원정대
대상지 네팔 가우리상카 서벽(7134m)
대원 강성우(대장) 신동우 피터젠슨 황인선 안치영 이영준
일정 2008년 12월 4일~2009년 1월 30일(58일간)
결과 남쪽으로 접근, 20피치 등반, 서릉 5400m 지점 도달
<캡션>
1. 쿨르와르 상단 마지막 피치를 오르고 있는 안치영 대원. 불안한 돌들이 얹혀있어 낙석이 매우 많이 발생했던 구간이다. 이 피치를 오르면 서릉과 만나는 플라토에 닿게된다.
2. 콜을 넘어서자 가우리상카 서벽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남은 여력으로 등반을 계속하기엔 너무나 멀리 있었다. 피터와 안치영 대원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3. 동강 카르카를 지나 통마르낭 계곡 사면에 흙을 파내고 설치한 카라반 캠프. 물이 있는 곳에서 야영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 높인 고도가 200m에 불과한 적도 있었다.
4. 하단벽 9피치 오버행 구간을 등반 중인 피터 젠슨.
5. 5400m 콜에서 하강을 준비 중인 피터 젠슨 대원. 뒤로 보이는 봉우리는 가우리상카 남동릉상의 전위봉이다.
6. 쿨르와르 구간 4피치를 등반 중인 피터 젠슨.
7. 쿨르와르는 남동향이었지만 양쪽이 거대한 절벽으로 막혀 12시가 넘어서야 햇볕이 들어왔다.
8. 4800m 지점에 데포캠프를 설치하고 모든 대원들이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이후 등반은 뒤편 왼쪽 쿨르와르를 통해 이어졌다. 왼쪽부터 피터 젠슨, 신동우, 강성우 대장, 안치영, 이영준.
9. 5400m 콜에서 하단 체링마 빙하 정찰을 하고 돌아오고 있는 안치영 대원. 콜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지도상으로 티베트 땅이다.
10. 하단벽 첫 피치를 주마링 중인 피터 젠슨. 하단벽에 총 500m의 고정로프를 설치했다.
11. 체링마 빙하 4800m 지점에서 바라본, 석양에 물든 가우리상카 서벽.
12.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 4200m 지점의 테라스.
13. 하단벽 마지막 완경사 구간을 오르고 있는 강성우 대장. 삼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베이스캠프 주변에는 매일 오전부터 가스가 찼다.
14. 카라반 4일째, 3일만 더 전진하면 서벽 베이스캠프였으나 길은 산사태로 인해 모두 사라져있었다.
15. 통나무를 잘라 대나무로 엉성하게 엮은 다리를 건너고 있는 신동우 대원. 베이스캠프까지 50년대 원정대처럼 길을 만들어 가며 조금씩 전진했다.
16. 쿨르와르 마지막 상단 벽을 넘어서고 있는 안치영 대원. 공제선을 넘어선 곳이 서릉과 만나는 플라토이다.


